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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국인의 축구에 대한 사랑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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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서 축구를 앗아가는 것은 한국인에게 김치를 앗아가는 것과 같다? 비교 대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영국인에게 축구는 그야말로 전부입니다
 

오늘은 얼마나 영국인이 축구를 좋아하는가를 제가 처음으로 느꼈던 에피소드를 소개해 드릴게요.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익히 들어서 있겠지만, 영국은 리그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FA컵이나 칼링컵은 하부리그의 팀들과 프리미어 팀들간의 경기가 종종 벌어져 하부리그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컵 경기는 큰 인기죠. 저 같은 프리미어리그 팬이면, 경기력이 약간 떨어지는 팀과의 경기는 조금 꺼리게 되지만, 하부리그 팀의 팬들에게는 큰 축제이자, 그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날이 됩니다. 이 인기를 반영하듯, FA컵 같은 경우는 BBC에서 생방송으로 중계하죠.

 

2006년도 어느 날, 첼시와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경기가 있던 날입니다. 나는 웬일인지 프리미어리그 팀(첼시)과 노팅엄 포레스트(리그 1, 잉글랜드 2부 리그)의 경기에 선뜻 나서게 되었죠. 첼시가 이기는 게 뻔했고, 그 결과를 알기에 재미가 없을지라도, 한번 FA컵 경기를 관람해보고 싶었던 맘이 앞섰던 것이었습니다.

 

첼시 구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여느 프리미어리그 경기와는 다른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FA컵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 그 생동감은, 먼 거리를 이동해 왔을지언정 전혀 주눅들지 않았던 원정 팬들의 함성소리임을 발견했습니다. 어느새 주변의 입장하던 영국 기자들이 원정 팬들 앞에 모여들었고, 일부 팬들은 인터뷰까지 응했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고,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 팀의 응원가에 귀기울이며 뭐에 관한 것인지 파악하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들에 손자까지...노팅엄 포레스트 팬들이 첼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국 기자들 앞에 포즈를 취하죠. 저도 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응원가의 힘일까. 버스에서 갓 내린 다른 원정 팬들도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기자 앞으로 모여들더군요. 같이 사진 찍고, 노래 부르고정말 그들에겐 축구 경기가 축제였고, 나는 이들을 보며 정말 축구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첼시 구장으로 가면서, 내 맘 한구석에 떨치지 못했던 어차피 첼시가 이길 경기 뭐 하러 보러 가나하는 생각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고, 이들에게도 그런 것 따위는 상관 없다는 듯이 응원을 계속했습니다.

어느새 더 많은 원정 팬들이 모였습니다. 응원가는 더 커졌고, 축제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팬들을 실망시키 않기 위해 열심히 준비 운동하는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들입니다. 관중석에는 이미 원정팬들이 노팅험 포레스트 응원기를 내걸었죠.

저는 이제 경기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원정 팬들의 모습을 구경하기에 바빴습니다. 와서 느낀 것은 FA컵 경기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보다 원정 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FA사무국에서 원정 팬 티켓을 많이 확보해두라는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내심 짐작했죠. 운동장 4면 가운데 한 면을 1층과 2층을 모두 독차지 했을 정도였고, 당연히 경기 중 그 함성소리가 아주 컸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정팬들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죠.

경기가 시작되면, 원정팬을 마주보고 있는 첼시의 안전요원들이 긴장합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날 아무 사고도 나지 않았습니다.

원정 팬들의 모습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경기 결과는 역시 생각이 안 나지만, 역시나 노팅엄 포레스트가 대패했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경기를 보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어느 팀이 이겼다는 스토리가 머리 속에 남는데, 이 날의 기억은 FA컵 경기의 원정 팬, 그것도 하부리그에서 온, 그리고 그들의 축구에 대한 사랑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축구장에서 노팅엄 포레스트 팬들은 경기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 경기장을 나서는 그들 얼굴의 미소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열심히 뛰었다 혹은 할 만큼 했다고 팬들은 느끼는 듯했죠.
그들은 경기에 졌어도 그 함성소리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마 버스 안에서도 계속 응원가를 불렀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경기가 끝난 후 자신들의 팬들을 향해 박수를 쳐주는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들.

경기에 져도 참가한 것 자체를 더 기뻐하는 노팅엄 포레스트 팬들 모습에서 영국 축구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응원 온 사람들의 광경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죠.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축구를 응원하고 있으니 아직 한국 축구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저도 계속 응원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 가까이에서 사진 찍게 도와준 첼시 안전요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만, 역시 나의 사진은 화질이 좋지 못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