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지하철을 탔는데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강남역에서 정자역을 가기 위해 새로 생긴 분당선 플랫폼 아래로 내려갔다. 플랫폼에 도달하니 어느 정도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 중 사람들이 가장 적은 곳으로 갔다. 피곤했기 때문에 앉아서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줄을 선 것이다. 내 앞에는 다소 나이든 분들께서 서너명 계셨다. 머리에는 중절모 비슷한 모자를 쓴 어르신도 있었고, 화장을 진하게 하신 나이든 아주머니도 계셨다.
희한한 일은 열차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줄은 선 곳 왼편은 노약자석이 앉는 곳이었고, 오른편이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내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의 의미는 노약자석에 앉을 수 없는 일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이 앉는 곳이었다.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리고 나는 노약자석이 아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 앞의 어르신들 모두 나와 같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어르신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내 눈 바로 앞에서 남은 한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 그렇게 지하철 객차 안에 나는 홀로 서 있는 뻘줌한 상황이 되었고, 이 상황을 모면하려 고개를 돌려 문 근처로 행하려고 했는데, 노약자석에는 아무도 않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또 무슨 상황인가.
나는 평소 같으면 앉지도 않았을 노약자석이지만, 피곤했기에 슬금슬금 노약자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서, 지하철 내의 모습은 노약자석에 앉아도 별 상관이 없는 어르신들이 모두 일반석 자리에 앉고, 겉으로 보기에 전혀 노약자 같지 않은, 한 건장한 청년이 노약자석에 홀로 앉아 가는 꼴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자역까지 그렇게 홀로 노약자석에 앉아 오면서 여기 앉아 있으면서 어디 몸이 아픈 노약자인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노인분들은 노약자석에 먼저 가서 앉지 않는 것일까'
만약 내가 노인이라면, 과연 노약자석에 먼저 앉을 것인가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봐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먼저, 선착순으로 먼저 지하철에 들어선 노인분들이라면 선택할 권리가 있다. 노약자석과 일반석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가 그 노인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선택권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일반석을 선택하게 된다. 즉, 노약자석에 앉는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늙었다고 인정하는 셈이며, 그런 인정을 하고자 하는 노인분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 늙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물론, 누구나 늙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늙으면서 기분 좋게 늙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심리는 지하철에서 노인분들이 노약자석에 먼저 가서 앉지 않는 것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약자석에는 대부분 노인분들이 많이 앉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노인분들은 노인분들과 앉아 가는 것보다 젊은 이들과 앉아 가는 걸 선호한다.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은 노인분들 속에 섞여서 가는 것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즐긴다. 접촉이라고 하면 어감이 좀 그렇지만, 지하철에 앉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람과 어깨를 맞대고 즉, 접촉하면서 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확대 해석은 하지 않길 바란다.
노인분들은 노인들끼리는 자주 어울려 왔다. 노인정에서도 그렇고, 관광을 가서도 그랬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그리워진다. 말은 하진 않지만,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옆에 앉아 갈 수 있는 곳은 노약자석이 아닌 일반석이다. 지하철에까지 와서 노인들에 섞이는 것보다 일반석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노인들과 섞이는 걸 더 좋아하는 노인분들도 있긴 하다. 모든 노인분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일 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인분들과의 동질감 내지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같은 목표를 위해 혹은 그저 같은 환경에 처해 있기에 뭉치는 경향이 있다. 노인분들 역시 동질감을 바탕으로 그들끼리 서로 뭉치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지라도 사회적으로 형성된 끈끈한 동질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길거리에서도 처음 만난 노인분들끼리 흥겹게 대화를 나누며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이처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하철 노약자석 관련해서도 이러한 상황은 쉽게 볼 수 있다. 노약자석에 앉아 가는 한 아주머니가 내릴 때가 되자 저 멀리 일반석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를 불러 자신이 내리니 여기 앉아 가라는 훈훈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둘은 지하철에서 처음 봤지만, 그 어떠한 동질감 혹은 보이지 않는 공동체 의식으로 서로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인분들의 이타적 모습은 왜 노인분들이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우선, 지하철 내의 노약자석은 노인분들이 쉽게 앉을 수 있는 자리다. 나 같은 건장한 청년이 자리에 앉아 가고 있다면, 노인분이 내 앞에서 헛기침만 해도 나는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야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먼저 탄 노인분들이 일반석을 점유하는 것은 다음에 탈 노인분들을 위해 노약자석을 양보했다고 보면 된다. 처음부터 노약자석에 앉을 경우, 일반석은 ‘보통 사람’들이 차지해 다음에 열차를 탄 노인분들이 일반석은 물론 노약자석에도 앉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즉, 노인분들이 노약자석에 먼저 앉지 않는 이유는 언제든지 다른 노인분들이 앉도록 하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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