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답 안해주면, 은행에 있는 동안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귀찮아도 대답은 해줬다. 달러 바꾸러 왔다고, 여기 앉으면 되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자리에 앉는 것도 허락 받고 앉아야 하는지, 대답하고 나서도 어이가 없었다. 손님을 위해 안전요원이 정 은행일을 도와주고 싶다면,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분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나는 그런 도움이 필요없다. 내 입장에서 보면, 매번 올 때마다 물어보는게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나 방금전에 왜 은행문을 통과했는지도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도 아니다. 나는 은행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알고, 무슨 일을 해서는 안되는지도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은행에서 빨리 일을 마치길 바라고 있다.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는 것도 짜증나는데, 안전요원까지 쓸데없는 말을 시키니 당연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안전요원의 입장과 생각
저기 옷차림이 이상한 사내가 한 명 들어 온다. 트레이닝복에 야구 모자를 거꾸로 썼고 껌도 질겅질겅 씹는다. 번호표를 뽑은 후, 은행을 둘러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자리에 앉아 있는 폼도 약간 건방져 보인다.
내 직업은 은행에 오는 모든 고객들이 안전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 청년이 들어옴으로써 은행 내 다른 고객들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조금 불안하게 느낄 수 있다. 몇 번 본 것 같기도 한데, 공개적으로 이 청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다른 고객의 불안감을 조금 덜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어떤 일로 왔는지 내가 도와줄 것은 없는지 물어봤다. 역시 대답하는 것이 약간 건방지다. 가까이서 보니, 나는 전에도 이 청년을 본 적이 있다. 지난번에도 달러를 바꾸러 왔던 걸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공개적으로 이 청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왜 왔는지를 파악했고, 주변에 있는 고객들도 듣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앉지만, 은연중 이 청년이 왜 왔는지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주변에 있는 모든 고객은 이 청년이 달러를 바꾸는 일 이외의 행동을 한다면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대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은행의 안전 요원과 내 생각에 숨겨진 행동경제학
은행에서의 나의 행동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관성(Inertia)의 법칙’이 작용했다. 먼저, 나는 은행에 들어와 내 볼 일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빨리 온 사람이 서비스를 먼저 받는 것이 당연하기에,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앉아서 기다리면서 내 머리 속은 은행 벽에 붙어 있는 환전표를 보며 내가 가진 달러를 바꾸면 원화로 얼마로 바꿀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었다. 은행에 온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 몸과 머리는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안전요원의 질문은 나의 관성을 저지시키는, 그래서 반발을 일으키는 심리학적 작용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은행 안전요원의 입장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손실혐오(Loss Aversion)’와 관련이 있다. 안전 요원의 임무는 당연히
은행의 안전이다. 먼저, 안전요원이 나에게 말을 함으로써
다른 고객들이 좀 더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줬다. 이 안전한 느낌은 이들을 은행에 다시 찾도록 하게
한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손실 보전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 은행털이 강도범이었다면 안전요원은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리 알아차릴 가능성이 크다. 강도범들은
은행을 털기 전 대부분 긴장한다. 자신의 무기를 들킬까 두려워 온 몸에 땀이 많이 난다든지 말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안전요원은 그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다. 만약 정말 은행 강도범이었고, 이런 사소한 대화로 대비할 수 있었다면, 은행의 손실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직업도 지킬 수 있다. 즉, 이런 사소한 대화는 이익보다 손실에 민감해 하는 오랫동안 형성된 안전요원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상 생활은 거의 모두 행동경제학이란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내가 런던에서
경제학 과목 중 행동경제학 과목을 제일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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