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는 수능이 끝났다. 수능을 잘 봤다고 느낀 학생은 두달만 있으면 이제 대학 캠퍼스로, 스스로 못 봤다고 느낀 학생은 재수학원으로 향할 것이다. 그 어디가 되었든 우선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수고'는 중의적으로 말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시험을 본 것에 대한 수고의 뜻도 있지만, 우리 사회 발전을 후퇴시키는 그런 쓸데없는 시험을 본 것에 대한 고생의 뜻이다. 쓸데없는 것을 하는 것만큼 고된 일도 없다!
쓸데없는 수능 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미리 말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의 주장도 아닌 나만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저 이 블로그의 제목처럼 하나의 색다른 시각이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먼저 수능 시험이 왜 쓸데없는지 한번 살펴보자.
수능 시험은 언어, 수리, 사회, 과학, 영어 과목을 본다. 그리고, 이 수능 시험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문제에 답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영역 문제에 나오는 문학작품을 보자. 소설이나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같은 작품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슬프게, 기쁘게 혹은 우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짧은 글 안에 많은 뜻을 내포해야 하는 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수능 시험에서는 이런 것들을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만 외워야 하고 그렇게 답을 골라야 점수를 얻는 것이다. 사회나 과학이란 과목도 마찬가지로 무조건 외어야 한다. 조선시대 왕 이름 혹은 갑신정변이 을사조약 후에 일어났는지 전에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고, 물과 소금물을 섞어 농도를 구하는 방법을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영어는 어떤가. 이것은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능을 보고 토익도 보고 하는데, 실제로는 영어 한마디도 못한다.
수학 과목도 마찬가지다. 수학 문제를 푸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수능 시험에서는 시간을 주고, 그 안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푸는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만 깨치도록 유도한다. 그래야, 주어진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풀고 가능한 최고의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즘 계산기가 보편화되어 있고 컴퓨터가 있는데, 연필로 머리를 굴려가며 빨리 푸는 19세기 방법을 아직도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아인슈타인 혹은 1935년 이전까지 문헌적으로만 존재하는 경제학 이론을 수학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탄 폴 새뮤얼슨 같은 인물은 만약 이런 형식의 수학 시험을 봐야 했다면 신물을 느끼며 포기했거나 일부러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애초부터 문제를 빨리 풀 생각이 없으며, 장기적으로 차근차근하게 시간을 갖고 모든 요소와 가능성을 고려해 문제 해결에 힘쓰려는 자세 내지는 정신 때문이다.
결국, 수능은 우리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죽이고, 피상적인 지식의 습득만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그 스스로 다양한 시각을 갖고,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또한 존중해주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데, 그런 겸양을 배우는 것 자체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그저, 어떻게 하면 수능 시험을 제 시간 내에 제대로 풀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갈까 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학생들을 획일화된 하나의 생각으로 묶고 다양한 학생들의 개성을 국가가 직접 나서서 억제하는 셈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사회의 발전은 없으며 후퇴할 뿐이다.
수능 시험 때문에 명품 가방에 대한 집착하는 사람들
수능 시험의 폐해는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학생들을 학창 시절 내내 다양성과 개성을 없애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분위기가 수능 공부를 해야만 하고, 또, 사회 모든 구성원이 학생들을 무의식적으로 수능이란 한가지 목표만 바라 보면서 살아가겠금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환자가 최면술사에 의해 흔드는 추에 홀리는 것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학생들을 쓸데없는 수능을 보도록 남몰래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홀린 학생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깨어나지 못한다. 습관처럼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즉, 다양성과 개성이 없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옆에 앉은 짝보다 수능을 더 잘 봐서 좋은 대학교 가는 것만 생각하는 것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남들보다 더 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명품 구두, 가방, 옷 등 ‘사치품’에 집착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수능 시험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독 명품 소비에 집착한다는 말은 마치 브라질에서 한 사람이 휘파람을 부니 우리 나라에 태풍이 분다는 말처럼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해외 명품 브랜드에 매년 1조원씩이나 쓰고,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여성들은 누구나 똑같아 보이는 명품 가방 하나씩을 메고 다니는데, 이것은 개성이 아닌 획일성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명품 가방을 들지 않으면 스스로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남들과 똑같은 가방을 메는 것이다. 마치 남들 모두 수능을 보는데, 자기만 왠지 예체능으로 가면 안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만약 지금 명품 가방이 없는 여성이라면, 남들 다 메는 명품 가방이니 큰 마음 먹고 하나 사기로 결정한다. 다수의 친구들이 수능을 보니까 나 또한 이들과 함께 수능공부를 하며 동질감을 느끼려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명품 가방을 하나 샀으면, 명품 가방을 메고 다니지 않는 다른 여성들을 은근히 깔보기도 한다. '일반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성'이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능 때부터 배워왔던 습관이다. 수능을 위해 학창시절 내내 공부하면서 하나의 답만 추구했던 것처럼, 이제 명품 가방만이 '하나의 답' 혹은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맹목적인 명품 소비 행태를 보면 거기에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런 명품 소비가 성인이 되어 갑작스럽게 생긴 과시욕과
허영 혹은 자기만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다양성과 개성을 무시하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육의 끝판왕' 즉, 수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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