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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견

노인분들이 노약자석에 먼저 앉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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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내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자리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한 환승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젊은이들도 많았고, 노인 분들도 몇 명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지하철 내로 들어 오는 장면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기분 나쁘게 사람들을 쳐다 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몇 정거장 가는 동안 지하철 내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나름 분석해 보니, 한가지 법칙 아닌 법칙이 발견되었다. 바로, 노인 분들은 지하철 내 자리가 많이 남아 있을 때, 노약자석에 먼저 가서 앉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생각에는 그들이 노약자석에 먼저 앉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메트로 혹은 철도 공사가 그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인데, 이들은 어떻게 보면 그것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왜 노약자석에 먼저 가서 앉지 않는 것일까?

 

경제학적 논리부터 시작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의 원리부터 시작하면,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공급으로, 그리고 앉을 자리를 찾는 노인 분들은 수요자로 볼 수 있다. 남은 자리가 많이 남았다는 말은 공급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인데, 노인 분들이 지하철을 탈 때, 노약자석을 포함한 다른 자리가 많다면 그만큼 수요자의 우위로서 그들이 어디에 앉을지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반 상품 시장에서 라면이 많이 공급되어 있다고 하자. 소비자들은 이것저것 따지며 가장 합리적인 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가격도 따져볼 것이고, 맛도 따지게 된다. 이런 경제 논리라면, 결국 노인 분들이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것도 이것저것 따진 후에 가장 합리적인 것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노인 분들이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것은 합리적이기 때문?

 

노인 분들이 지하철에 자리가 많을 경우,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일반석에 앉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다음에서 말하는 이유가 위에서 말한 경제학적 논리보다 더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있다.

 

첫째로, 노약자석에 선뜻 앉는 것 자체가 자신이 노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늙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신이 늙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더더욱 싫을 것이다. 늙었더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따라서, 심리적으로도 자리가 많을 경우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먼저 일반석에 앉게 된다. 일반석 자리가 다 꽉 찰 경우, 그제서야 마지못해 노약자석에 앉게 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그리고, 노약자석은 그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앉을 수 있는 그런 자리다. 만약, 그 자리에 젊은이들이 앉았다면, 그 앞에서 기침 한번만 하면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 따라서, 노약자석은 어떻게 보면 그들이 이미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노인 분들이 없다면, 그 자리는 항상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중국집에 갔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과 같다. 만약 친구 셋이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서 먹는다면, 자기 자장면을 먹는 속도보다 탕수육을 먹는 속도가 더 빠르다. 탕수육은 공동으로 먹는 것이고 자장면은 자기의 것이라는 친구 사이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장면을 굳이 먼저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것인 노약자석을 바라보는 노인 분들의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노인 분들은 그들만의 공동체가 있다. 이 세상에 사회적으로 약자라고 볼 수 있는 그들이 살아 남는 방법은 집단으로 행동하여 그 힘을 유지하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막대한 힘이 있는 재벌가에 대응하기 위해 노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인 분들은 그들 스스로 직접적 관계가 없을지라도 사회적으로 형성된 끈끈한 동질감이 있다. 물론, 노조들처럼 그들의 동질감을 밖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런 공동체 의식은 곧 그들 사이의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 처음 지하철을 탄 노인 분들이 자리가 많은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일반석에 앉는 것은 이후 지하철을 타게 될 다른 노인 분들이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게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어차피 노약자석은 노인 분들이 앉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노약자석에 앉을 경우, 다음에 지하철을 탄 노인 분들이 자리에 앉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다. 그 사이 일반석이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석이 가득 찰 경우 결국 숫자도 얼마 없는 노약자석을 두고 그들끼리 경쟁해야 한다. 이것을 보면 노약자석에 이미 앉아 있는 노인 분들도 안타깝고, 그걸 보는 사람들도 안타깝다. 만약 일반석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아니라면 노약자석 앞에 선 노인 분들은 하루종일 서서 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온 노인 분들은 일반석에 자리가 있으면 일반석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인 분들이 노약자석에 먼저 가서 앉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제, 심리, 사회적인 이유가 모두 포함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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