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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제대 3년, 가장 기억에 남는 3가지

에그2 2014. 11. 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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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카투사 제대한지 3년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카투사 생활이 기억난다. 재밌던 일도 있었고 짜증나는 일도 많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내 성격상 이제 좋은 기억만 남은 것 같다. 내가 워낙 긍정적이라 부정적인 일은 왠만하면 쉽게 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투사 제대 3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외박과 외출


카투사가 가장 좋은 것은 업무 시간 외에 외박과 외출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물론, 이병이나 일병은 선임들의 눈치를 봐야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일병 3호봉만 넘어가면 외박과 외출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외박은 말 그대로 부대 밖에서 자고 오는 것으로, 카투사인 경우 주로 주말이나 휴일에 해당되었고, 외출은 평일에 잠시 부대 밖에 나갔다고 점호 시간에 맞게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가끔 외박을 통해 카투사 동기들 또는 후임들과 지방 여행도 가곤 했다. 여름에는 부산으로 미군 친구들과 놀러가기도 하고, 제대를 한달 앞두고는 동기와 함께 제대 여행이라고 해서 포항에 놀러갔다 온 적도 있다. 이렇게 카투사 외박은 매 주말 자유롭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카투사들은 주말 동안 공부를 하거나 집에 가서 쉬는 사람도 많았다. 


외출 같은 경우는 보통 평일에 업무 시간이 끝나면 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외출은 보통 5시 정도에 업무가 끝나고 난 후 나가 10시 정도까지 들어와야 한다. 나도 가끔 업무가 끝나면 외출을 하곤 했다. 가장 많이 갔던 곳은 피씨방으로 피씨방 아래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을 사서 게임을 하면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그만큼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지만, 부대 안으로 다시 들어와야 하니,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도 한다. 간혹 부대 복귀 시간이 늦어 징계를 받는 카투사도 봤다. 특히, 미군과 같이 어울리다 보면 밤에 들어와 다시 부대 밖에 나가는 카투사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알려진다면 육군측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 


둘째, 미군과의 에피소드


미군과의 에피소드는 참으로 많다. 지금 여기 블로그를 통해 공개되고 있는 '나는 카투사다' 이야기도 약간의 허구가 포함되어 있지만, 거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한번 1편부터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사실, 미군은 우리들과 문화도 다르고 워낙 다양한 성격의 미군을 봤기에 재미도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으로 짜증도 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카투사에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는데, 종종 미군과 같이 방을 쓰며 영어를 배우다 미군 또는 외국인에 대한 환상이 깨져 괴로워하는 카투사도 많이 봤다. 하지만, 미군과 카투사 역시 같은 부대 사람 소속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이해를 해주면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한가지 내가 가장 기억나는 미군과의 에피소드는 미군 훈련 후 얻은 마지막날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카투사가 편하다고 하지만, 훈련은 미군 훈련을 그대로 받는 만큼 우리 나라 군대보다 훈련이 더 힘들다. 특히, 미군은 훈련 때마다 마치 삼국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무거운 갑옷 같은 것을 입고 하기 때문에 이걸 입고 뛰어다니면 온통 땀에 젖을 각오를 해야한다. 


한번은 2박 3일동안 어느 야산 꼭대기에서 미군과 훈련을 했었다. 샤워시설도 화장실 시설도 없는 그런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전투훈련을 했는데, 험비를 타고 험비 위에서는 기관총을 사격장에 쏘아대고 험비를 장애물 삼아 엄호하는 훈련 등 주로 차량을 가지고 훈련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옷 자체가 무거웠기 때문에 금방 지쳤다. 지친 후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밥은 겨우 야외에서 다 식은 밥이나 미군 전투식량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날은 정말 가관이었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고 텐트를 다 걷은 후 시간이 남아 미군과 카투사는 산 정상에서 편을 나눠 야구 시합을 벌였다. 힘든 훈련으로 모두가 지쳤지만, 어디서 테니스공이 생겼는지 산 정상에서 나무 막대기를 배트로 삼아 그리고 돌멩이를 베이스 삼아 야구시합을 한 것이다. 햇빛이 뉘역뉘역 지는 산 정상의 꼭대기에서 미군과 카투사가 벌이는 야구 경기, 웃음기 빼고 진지하게 훈련을 받아 모두가 지쳤지만, 야구 경기 하나로 다시 웃음꽃이 피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나도 힘든 훈련이 끝나서 그런지 마냥 즐거웠던 기억이다. 


필자의 스나이퍼 설정샷, 하지만 총이 M110 SASS가 아닌 M16A2라는 것이 함정.


셋째,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한 할아버지


나는 운전병 출신으로 카투사에서 다양한 차량을 운전했다. 세단, 트럭 그리고 험비까지 모두 운전해봤고, 우리 전국 국토를 거의 모두 돌아다녔다. 그런데, 운전을 하다가 한가지 지금까지 기억나는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업무상 서울역에 볼 일이 있어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한 할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담배 한개피를 드릴 요량으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통 서울역에서는 담배 한개피 정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나의 담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할아버지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군북을 보고 미군인지 물었고, 나는 미군과 함께 복무하고 있는 카투사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는 눈물이 글썽글썽 거리며, 약간 울먹이며 말씀을 5분여간 이어갔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자신은 어렸을 때 대구 미군부대 근처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이 상황이만큼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고, 할아버지 역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먹을 것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미군이 고맙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나는 이 때 이 할아버지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카투사 복무 당시 일부 국민들은 미군을 추방하자는 말도 나오고 미군의 존재 자체에 반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를 만난 후 여전히 일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미군을 고마워한다고 또는 고마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내가 카투사로 복무하면서 미군에 대한 사건사고가 나올 때마다 안타까웠던 마음을 날려줬던 아주 뜻깊은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