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카투사로 복무하면서 가장 가슴뭉클했던 경험

에그2 2010. 12. 2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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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에서 복무하는 카투사다. 보직은 운전병. 그 넓은 서울에서 안 가본 곳이 없을만큼 운전을 참 많이 한다. 너무 많이 해서 운전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자부한다. 전라도 빼고 전국 다 돌아다녀 봤고, 네비게이션 없이 초행길도 그만큼 많았다. 여기 와서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운전 실력만큼은 확실히 좋아졌다. 무사고로 전역하는 것이 이제 제일의 목표다.

 

운전을 하면서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물론 사고를 낸 적은 한번도 없기에 교통 사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때는 상병이 조금 꺾였을 때, (현재 병장까지 5일남음) 서울 역에 다른 군인을 마중 나갔을 때의 일이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오후, 나는 어김없이 서울역(물론 서울에서 가장 크고 번잡한 역)에 약속 시간 20분전에 도착했다. 원래 10분전까지 도착하면 되었지만, 가끔 혼잡해지는 서울역 입구이기에 미리 도착한 것이었다. 난 시간이 좀 남아, 주차를 한 후 간단히 차 내부와 외부를 청소를 했다. 세차는 매주 하니까 이런 청소는 트집 안 잡힐 정도만 하면 된다.

 

대충 정리도 끝나고 해서, 역 안에 들어가기전 담배를 하나 물고 허공을 바라보며 전역하는 그 날을 상상하는 순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운전하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엔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순간의 즐거움도 잠시. 점점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간혹, 미군 군복을 입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지곤 했지만, 이번은 그 시선의 성질이 약간 달랐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할아버지가 약간 처량한 눈빛으로 나를 빼꼼히 쳐다보시는 것. 난 담배가 거의 다 타 들어가 담배를 버리려고 휴지통으로 향했고, 담배를 버리고 고개를 돌리니 그 할아버지가 내 얼굴 1미터 앞에 서있었다. 깜짝 놀랐다. 이 할아버지 뭐지? 담배 달라는 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를 만지작거려 돗대가 아닌지 확인하고 담배 하나 줄 요량으로 할아버지에게 눈인사를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대뜸, 혹시 미군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카투사라고 내 오른쪽 어깨를 돌려 거기에 있는 태극기를 보여주고 얼굴엔 그건 왜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미군인줄 착각했다. 당연히, 미군과 같은 군복을 입으니까 착각도 할 만하다. 군복에 태극기만 미국 성조기로 바꾸면 미군이니까. 하지만, 할아버지가 나에게 접근한 진짜 이유가 있다.


결국 할아버지는 나를 앞에 두고 긴 이야기를 했다. 접근한 이유를 알기 위해 5분간 듣고만 있었고. 그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대구에 있는 미군 부대 근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때 그 시절이 다 그랬듯이, 할아버지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정말 굶어 죽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음식을 얻어 먹었다고. 물론 먹다 남은 음식인 걸 그 때 할아버지도 알았지만, 그거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는 뭐든지 먹어야만 했으니까. 초코렛도 가끔 얻어 먹는 날이면, 미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생각했다는 할아버지...그 땐 정말 고마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옛날을 회상하는지 할아버지 눈에는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울컥했던 것은 당연했고. 우리 나라가 예전 필리핀보다도 또 북한보다도 못 살았던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산 증인을 만나 보기는 처음이라 더욱 울컥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군인이 사람이 많은 역 한복판에서 울 수는 없는 일. 약속 시간도 다 되고 해서, 할아버지께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역 안으로 들어 갔다.

 

짧은 작별인사가 무색하게, 그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긴 여운을 남겼다. 요새는 언론에 미군 물러나라는 말도 많이 나오고 사람들은 시위까지 하는데, 이 할아버지 만큼은 미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평생 그와 함께 해왔고, 또 함께 할 거라는 사실. 또, 예전 미군 부대가 많았던 만큼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직 우리 나라에 아주 많을 거라는 사실. 카투사로 복무하면서 복잡한 심경에 이렇게 가슴 뭉클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eppinggreen@londonpoin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