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는 반팔 면 티셔츠의 깃을 확 세우고 왔다. 나도 패션 감각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 웬만해서는 남의 패션 가지고 아무 말도 안하는 성격이었지만, 왠지 이 패션은 조금 이상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실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친한 친구여서 그냥 직설적으로 말했다.
‘야, 그 깃 좀 내리면 안돼?’
내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다리미로 다려진 것처럼 빳빳한 깃 뒤에는 영문으로 로고 이름처럼 보이는 단어가 크게 써 있었기 때문이다. 깃 세운 것은 그렇다 쳐도 깃 뒤의 영문 로고까지는 조금 내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나와 만나는 내내 깃을 세우고 다녔다. 이렇게 세우는 것이 유행이라는 한마디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친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예전에 여자친구에게 에어로빅 옷 같다고 레깅스 입지 말라고 해도 계속 레깅스 입고 나온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처럼,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이 친구가 깃을 내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찌감치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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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을 통해 브랜드 이름을 드러낸 이유는?
우선, 표면적인 이유는 유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소 유행에 뒤쳐졌지만, 요즘 유행은 깃을 세우고, 그 깃 뒤에는 영문으로 브랜드 혹은 메이커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친구도 유행이라고 하면서 깃을 세우고 다녔다. 나는 약간 못마땅했지만, 이 친구는 유행이란 합리화로 그렇게 의기양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날 이 친구와 같이 있으면서 깃을 세우고 다니는 다른 남자들도 몇 명 더 볼 수 있었다. 내가 유행을 쫓지 않아서 몰랐는데, 여자들이 잡지를 보고 TV를 보고 유행을 타는 것처럼 남자들도 악착같이 유행을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옷을 통해 브랜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미국에서 우리 나라로 전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미국 사람들은 옷차림의 브랜드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90년대 미국의 잘 나가는 힙합 그룹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들은 신발, 바지, 티셔츠 심지어 목거리까지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여 노래를 불렀고, 이렇게 특정 브랜드의 제품만 사용하면서 자신과 그 브랜드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문화가 우리 나라에도 전해졌고, 지금은 거의 모든 옷들이 그 브랜드 이름을 옷 표면에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문화가 전해지기 오래 전에는 옷의 브랜드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히, 미국보다 전통이 있는 영국 상류층들의 생활을 보면 브랜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사고방식은 일부 계층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들이 그토록 옷의 브랜드 노출을 혐오했던 이유는, 옷의 메이커보다는 그 실용성과 내구성을 더 중요시했고, 무엇보다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했으며, 옷 브랜드 자체에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은 허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진짜 귀족의 풍채는 옷차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투, 표정, 행동, 정신 자세 등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영국 사람들도 이제 브랜드 이름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은 커다란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옷을 구매하며, 이것을 드러내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손쉽게 보이는 브랜드 이름으로 사람들을 구분하여, 같은 브랜드 이름의 옷을 입는 사람들끼리 그룹화한다. 옷의 실용성, 내구성, 편안함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브랜드 옷을 입고 있는지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나와 같은 종류 혹은 같은 레벨의 옷(비슷한 가격대의 옷)을 입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을 은연중 따돌린다. 자신과 급이 맞지 않다는 착각으로까지 발전되어 사람을 옷의 브랜드로 차별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지난 겨울 중고등학생들에게 대유행이었던 ‘노스’로 시작되는 점퍼는 옷차림 하나로 학생들이 그토록 단단히 단결되었던 것을 모든 국민들이 목격했다. ‘노스’를 입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로 그룹이 갈렸고, ‘노스’를 입어야 대다수의 학생들 무리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지금도 길거리에 여자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 하나같이 똑같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노스’를 입은 학생들처럼 단단한 단결심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명품 가방을 멘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브랜드를 드러낸 옷은 사람을 내면이 아닌 물질적의 판단으로 유도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이것이 과도하게 발전된 경향이 있다.
브랜드가 드러난 옷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노스’가 그랬고, 명품 제조업체가 그랬으며, 내 친구의 깃 뒤에 써 있는 브랜드 이름이 그렇듯이, 가까운 미래에는 또 다른 브랜드의 옷이 유행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롭게 유행할 브랜드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사람들은 브랜드 이름에 너무나 중독되어 있어, 기존의 브랜드 이름에 식상해 항상 새로운 브랜드 이름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마치 한 마리의 비둘기가 공원에 먹이 주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을 발견해서 날아가면, 주변의 모든 비둘기가 따라 날아가는 것처럼 모델, 텔런트, 영화배우 등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유행시킨 옷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 옷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특정 브랜드가 유행하는 방식이며, 사람들은 그 옷을 입고 마치 자신도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이렇게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동일시 하는 대상은 브랜드 이름을 알리는 영향력 있는 사람을 넘어 브랜드 이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우리가 브랜드 이름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은 그 옷의 광고를 대신해 주는 셈이다. 즉, 우리들 스스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면서 옷 광고를 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친구가 깃을 세웠던 것은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돌아다녔던 셈이다. 이것을 보다 깊이 생각해보면, 옷 제조업체의 보이지 않는 괘씸한 꼼수가 숨겨져 있다. 사람들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사 입고 유명인이 입는 옷을 입었다고 착각하지만, 옷 제조업체들은 옷에 브랜드 이름을 크게 적어 구매자들을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돈을 받고 광고해주는 것도 해줄까 말까 한데, 우리들은 돈을 주고 옷을 구매하면서 옷 제조업체 대신 옷 광고를 해주는 셈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개성이 있다. 옷 브랜드 이름으로 결정되지 않을 인간의 고유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옷 브랜드 혹은 메이커에 연연하지 말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옷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광고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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